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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티스토리 첫 입성! :나의 연대기-1

by ✍︎〠✷ 2018.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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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티스토리로 이사오기 까지는 많은 일이 있었다.

 

중학교 때 처음 시작한 블로그, 처음 접한 곳은 네이버였다. 그 때 블로그에 소설을 연재하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고, 나도 그 친구를 따라 뭔가를 끄적였던 것 같다. 친구는 서로 이웃도 많고 블로그를 통해 소통도 많이 했는데, 내 블로그는 보잘 것 없는 그런. 그러다가 저작권에 무지했던 중학생의 나는 어떤 게시글을 불펌했다가 네이버에게 밴을 당하게 되었다. 블럼프+밴을 겪고나니 당연히 할 마음이 싹 가셨다. 그렇게 중학생의 블로그를 마감하고, 관심있는 분야의 카페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많은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고양이, 그림, 사진, 패션, 여행, 공부 등이 그것이었다.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면 뭐 하나 진득하게 하는 것 없던 나였다. 항상 꿈에 부풀어 시작하고, 제 풀에 죽어 스스로 매듭짓는 그런 인생의 되풀이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연예인에 빠져 블로그에 잠시 연예인 관련 포스팅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좋아하지만 그 때는 정말 모든 게 궁금했던 블락비의 태일. 고등학생이 되고,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중학생 때보다 더 열심히 아무것도 안했다. (논 것도 아님) 공부, 블로그 보다는 음악을 듣고 나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EXO가 붐을 일으키고 단체로 집단최면에 걸린 듯 고3 때의 모든 것은 EXO였던 적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나랑 동갑인 사람이 운영하는 공부 블로그에 기웃거리기도 하고, 한창 GD&TOP을 너무 좋아해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찾는 구글서핑대모험도 했더랬다. 남는 게 뭐가 있나, 내가 끄적거리지 않으니. 남은 것은 공부 안 한 내 저질 성적과 밤새도록 서핑해 생긴 늘어난 모공들.

 

그렇게 어찌저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흘러가듯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에는 기숙사에 처음 들어갔는데 오로지 나의 자유가 생긴 것만 같은 설렘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시 자연스레 네이버 블로그를 새로 열었다. 이 때부터 블로그에 맛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포스팅하기 시작할 때는 친구들에게 링크를 돌려 놀러오게 했다. 조회수가 점점 높아지고 친구들 사이에서 반응도 꽤 좋으니 즐겁게 포스팅했다. 하루하루 내 일상을 남기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가! 당연히 행복할 수밖에. 감당할 수 없는 자유시간에 매일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미래의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었다. 미래를 준비해야하지만 지금의 햇살과 하늘, 공기가 너무도 쾌청했으니! 일상 포스팅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블로그를 채우니 나의 블로그에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3학년 때 다시 블럼프가 오기 시작했다. 왠지 포스팅하는 내 컴퓨터가 너무 느린 것 같고, 나만 뺀 모두가 토익 성적과 공모전으로 날밤을 새웠다. 돈이 없어 알바에 허덕이고 있는데, 과제는 왜이리 많은지. 선배들은 벌써 취업이 되어가고, 안정된 미래에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였다. 나만 따뜻한 햇살에, 상쾌한 공기에 취해 제자리에 앉아있었던 느낌이었다.

 

나는 글 쓰는 동아리를 했는데, 동아리 선배 중에 블로그로 돈을 버는 선배가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장학금으로 3천만원까지 모은 선배였는데, 돈 모으는데 빠삭했다. 블로그 체험단으로 항상 밥을 공짜로 먹고(나도 많이 따라감), 블로그 포스팅만으로 월 100만원 가까이 수입이 났다. 워낙 다재다능해서 성적도 원하는 대로 받으니 직장도 가고싶은 곳으로 간 듯했다. 나도 블로그를 하고 있었지만, 선배가 하는 방식으로 내 블로그를 운영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상업적인 부분과 타협하는 느낌이 대학 와서 처음 느낀 자유를 앗아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공간만은 내 것이므로 절대 사수!

 

그러나 이 생각에 변화가 차차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도 동아리의 한 선배에 의해서인데, 이 선배는 군대 복학 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래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 나는 그 당시 매우 행복했고,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상태였다. 밤에 가끔 선배가 나에게 고민상담을 할 때가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자신보다 어린 나에게 상담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주로 미래에 대한 걱정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선배가 인터넷에 웹소설을 연재해서 첫 정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금액을 보여줬는데 3만 얼마인줄 알고 축하한다며 그냥 넘겼다. 그런데 다시 보니 30만 얼마였다. 헉 대박 하고 나는 궁금증이 폭발해 여러가지 꼬치꼬치 물었다. 무슨 소설 썼어요? 조회수 1당 얼마예요? 어디에 올렸어요? 갑자기 소설 왜 썼어요? 착한 선배는 폭주하는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퓨전 판타지 소설이고, 1당 얼마이고, 웹소설 사이트에 올렸고, 게임 그만 두려고. 그렇게 그 선배는 다음 달 정산에 300만원, 그 다음 달 정산에 1,000만원 정도를 벌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렇게 자퇴를 했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의 오랜 꿈은 세계탐험가, 디지털 노마드, 자유로운 예술가. 근데 지금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저걸 이루지? 딱히 고민 안 했던, 사실은 불안하면서도 저 한켠으로 내몰고 회피해왔던 문제를 처음으로 제대로 직면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고민이 없어보이고, 다들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나만 텅 비어있는 느낌.

 

급하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나의 로망, 교환학생을 가기로 했다. 영어권을 가고 싶었지만, 경쟁자도 많았고, 준비도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도 4학년 1학기였던 나에게는 무리였다. 영어권으로 간다면 엄청난 돈이 듦과 함께 6개월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외국인 기숙사에 살며 영어를 익히긴 했지만, 제대로 이렇다할 준비도 해보지 않은 나에게 합격은 안전선 밖에 있었다. 결국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일본은 기숙사도 무료, 한 달에 3만엔씩 용돈도 나왔으며,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1년을 갔다 올 수 있었다. 언어를 익히려면 적어도 1년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6개월은 적응기간만으로도 부족했으니까.

 

히라가나도 다 기억 못하는 내가, 급하게 일본행이 결정된 뒤 발등에 불이 떨어져 종로의 시사일본어 학원 1달을 끊었다. 걱정만으로 결정된 행동이었다. 사실 이 때 블로그 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것 같다. 수업은 1시간 밖에 안 하니, 촌에 사는 나는 수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종로를 마구 휘젓고 다녔다. 매일 매일 간 곳은 서울국립현대미술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작가를, 첫 눈에 딱 반해버린 작품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때 나는 속에서 또 하나의 욕망을 발현시킨 것 같다. 창작 욕구가 마구 솟으면서, 작가의 감성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나의 일본어는 여지만 남긴 채, 어영부영 일본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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